기억이란 무엇일까? 인지심리학자들은 기억을 과거 경험으로부터 얻은 정 보와 지식을 유지하고 현재에 되살려 주어진 과제에 맞춰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수단' 으로 정의하고 있다(Tulving, 2000; Tulving & Craik, 2000), 기억은 대략적으로 부호화(encoding), 저장(storage), 인출(retrieval)의 세 가지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부호화는 감각 정보가 기억 속에 저장 가능한 표상(memory representation)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말하고, 저장은 부호화된 정보를 기억 속에 유지하는 역할을 일컫는다. 인출은 기억 속의 정보를 과제 수행을 위해 이끌어 내는 과정이다.
기억 연구를 위해 흔히 사용하는 과제는 크게 회상 과제(recall task)와 재인 과제(recognition task)로 나뉜다. 회상 과제는 기억 속의 정보를 아무런 단서 없이 이끌어 내도록 요구하는 경우고, 재인 과제에서는 회상과는 달리 단서를 제시하고 그것이 기억된 정보와 일치하는가를 판단하도록 요구한다. 예를 들어, 단답형 주관식 시험은 회상 과제로, 사지 선다형 객관식 시험은 재인 과제로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대개 회상 과제보다는 재인 과제에서 월등한 수행을 보인다.
사람의 이름을 회상하거나 재인하는 기억 과제는 기억 정보를 의식적으로 보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외현(explicit) 과제라 불린다. 하지만 의식적 또는 의도적으로 기억하고자 한 적이 없음에도 과거 경험을 통해 기억이 살아나는 암묵적 기억(implicit) 또한 존재한다. 예를 들어, 책을 읽을 때 자동적이고 즉각적 회상을 요구하는 수없이 많은 단어의 의미와 심리학 개념은 외현적 기억이라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인출되는 암묵적 기억에 가까울 것이다. 암묵적 기억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으나, 의식하지는 못해도 크게 무리 없이 기억할 수 있는 경우는 모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운전 시 숙달된 기어 변속에 필요한 기억이나 자전거를 탈 때 필요한 균형감의 습득에 관한 기억 모두 암묵적 기억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1) 전통적 기억 모형
1960년대 후반에 애트킨슨과 쉬프린(Atkinson & Shiffrin, 1968)은 기억을 세단계로 구분한 기억 모형을 제시하였다. 첫째는 감각 저장소(sensory store)로, 이것은 감각 기관을 통해 들어온 정보가 극도로 짧은 시간만 머무는 기억 저장소를 의미한다. 두 번째는 단기 저장소(short-term store)로, 여기에 정보가 머무르는 시간은 감각 기억에 비해 상대적으로 길지만 기억 가능한 정보의 양은 매우 제한적이다. 세 번째는 장기 저장소(long-term store)로, 무한대에 가까운 정보를 오랜 시간 영구적으로 저장하는 기억 저장소를 의미한다. 각 저장소에 저장된 기억 표상들은 각각 감각 기억, 단기 기억, 장기기억으로 불린다.
조지 스펄링(Sperling, 1960)은 일련의 실험을 통해 감각 저장소와 단기 기억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였다. 그의 실험은 단순한 항목(숫자나 알파벳 등)을 기억하는 과정에서 전체 보고(whole report)와 부분 보고(partial report)를 요구하였다. 전체 보고는 짧은 순간 제시된 여러 개의 항목을 전부 회상하는 과제였으며, 부분 보고는 항목을 제시한 직후 단서를 제시하여 그 단서가 지정하는 특정 항목만 부분적으로 회상하는 과제였다. 스펄링은 부분 보고를 사용할 경우 제시한 기억 항목의 숫자에 관계없이 기억 과제의 회상률이 매우 뛰어났으나, 전체 보고를 요구하면 피험자는 대개 4~5개 만을 회상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기억 항목이 제시된 직후 찰나의 순간 동안 유지되는 감각 기억의 용량은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반면, 전체 보고를 실행하는 3~4초의 지연 시간(예, 기억 항목에 대한 구두보고) 동안 살아남는 정보는 극히 제한되어있다는 사실은 감각 기억과 단기 기억 용량의 현격한 차이를 증명한다.
단기 기억에 저장되는 정보의 양은 얼마나 될까? 조지 밀러(Miller, 1956)는 다양한 기억 항목을 통해 단기 기억의 용량을 측정하여 약 7±2개의 항목이 저장될 수 있음을 보고하였다. 또한 이러한 기억 용량의 이면에는 정보의 조직화를 통해 기억의 효율성을 증가시킬 수 있는 의미 덩이 짓기(chunking)가 가능함을 발견하였다. 예를 들어, 국번을 포함한 이동전화번호 11자리를 외운다고 가정할 때, '01012345678'을 한꺼번에 외우기보다는 '010은 흔히 볼 수 있는 이동 통신사 번호, 1234는 국번, 5678은 전화번호…’와 같은 방식으로 정보를 조직화할 경우, 이 정보는 단기 기억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최근의 연구에서 좀 더 엄격한 측정 방식을 사용해 측정한 단기 기억의 용량은 각 감각 체계별(예, 시각, 청각 등)로 약 3~4개 정도인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Cowan, 2001; Luck & Vogel, 1997).
애트킨슨과 쉬프린의 모형에서 단기기억에 저장된 정보는 암송(rehearsal)과 정보의 조직화를 통해 장기기억으로 전환된다. 장기기억으로 넘어간 정보의 용량은 얼마나 되며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까? 현재까지 장기기억의 용량에 한계가 있는지를 명확히 밝혀 주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몇몇 연구 사례는 장기 기억의 용량이 무한대일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기억 실험의 일환으로 고령의 노인들에게 25년 전 고등학교 동창의 사진과 이름을 재인하게끔 요구하였는데, 피험자들 모두 동창들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Bahrick, Bahrick, & Wittlinger, 1975).
2) 대안적 기억 모형
기억을 설명하는 다른 대표적인 모형에는 크레이크과 로크하트(Craik & Lockhart, 1972)의 처리수준모형과 배들리(Baddeley, 1986)의 작업기억 모형이 있다. 크레이크와 로크하트는 기억이 단계별로 분리되어 있기보다는 부호화와 인출 단계에서 정보를 얼마나 심도 있게 처리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제안하였다. 크레이크와 툴빙(Craik & Tulving, 1975)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단어 목록을 보여 주기에 앞서 그 단어들과 관련이 있는 질문을 제시하였다. 제시된 질문은 뒤이어 제시되는 단어들의 의미와 관련이 있었는데, 이것은 단어들의 처리 수준을 좀 더 깊이 있게 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들은 제시된 질문들의 처리 수준을 낮은 수준부터 높은 수준까지 물리적(physical), 청각적(acoustic), 그리고 의미적(semantic) 수준으로 변화시켰다. 그 결과, 질문에 의해 활성화된 처리 수준이 깊을수록 단어들의 회상 및 재인율이 높아졌다. 즉, 의미적 수준처럼 연관성이 높고 처리 수준이 깊으면, 기억 정보는 비교적 장기간 저장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처리 수준이 낮은 것으로 분류되는 방법을 사용했음에도 기억 효율이 좋은 경우(예, 시에서 운율의 사용)가 보고되면서 모형의 타당성이 많이 퇴색하였고, 현재는 처리 수준이 아닌 처리와 관련된 감각 양식(sensory modality)을 강조하는 모형으로 수정되었다.
저장소의 기능을 강조한 기존의 기억모형과는 달리, 배들리(Baddeley, 1986)는 기억 정보의 흐름을 제어하는 중앙 집행기(central executive)를 포함시켜 저장소의 정보를 능동적으로 활성화하고 유지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부각시켰다. 그의 작업기억(working memory) 모형에 의하면, 기억이란 감각기관을 통해 유입된 정보 또는 장기기억에 저장된 정보가 활성화되고 유지되는 과정이다. 여기에서 단기 기억은 기억 저장소의 기능뿐 아니라 중앙 집행기가 정보를 일시적으로 저장하고 조작하는 과정을 모두 총괄하는 개념이다. [그림 1]에 도해된 바와 같이, 배들리는 작업 기억이 주의와 반응 통제를 담당하는 중앙 집 행기와 시각적 정보를 저장하는 시공간 잡기장(visuo-spatial sketchpad) 및 언어 이해와 청각적 암송을 담당하는 음운 루프(phonological loop), 마지막으로 기타 종속 체계들(subsystems)로 구성되어 있다고 제안하였다. 기억 과정에서 능동적 정보 처리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의 모형은 다른 여러 기억 모형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기억 현상을 설명해 줌으로써 가장 합리적인 모형으로 각광받고 있다.
[그림 1 - Baddeley의 작업 기억 모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