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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개론

심리학개론/심리학이란 무엇인가?(2)

Inferno.1 2020. 11. 8. 00:47

2) 심리학의 역사

다른 과학과 마찬가지로 심리학은 시대에 따라 변화되어 왔다. 그뿐 아니라 사회, 문화, 역사적 맥락과 주변 학문의 발전에 영향을 받아왔다. 오늘날의 심리학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그 기원을 이해해야 한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과거 심리학의 역사나 이론을 살펴보면, 상식에서 벗어나거나 비과학적인 주장들을 접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시의 사회, 문화, 역사 또는 다른 학문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심리학의 근원 - 심리학의 역사적 근원은 철학과 과학에 있다. 19세기 후반 학자들의 마음의 연구에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하면서 심리학은 비로소 하나의 독립적인 과학적 학문으로 자리를 잡았다.

 

ⓐ 심리학의 철학적 근원

심리학의 철학적 근간은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며, 특히 지식에 관심을 가진 플라톤(platon, B.C. 427~347)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플라톤은 지식의 원천 면에서 감각을 의심하였다. 그는 우리의 감각은 곧은 막대기가 물속에서 굽어 보이는 것처럼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지각하기보다는 왜곡하여 지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그는 인간은 원래 지식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믿었으며, 추론(reasoning)이 이러한 지식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철학적 접근을 합리주의(rationalism)라고 부른다. 플라톤은 꿈, 지각, 정신질환을 포함한 다양한 심리학적 주제를 연구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플라톤을 비롯한 여러 뛰어난 철학자들은 추론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어떤 대상을 보는 것은 우리의 눈에서 발산된 빛을 통한 것이라고 잘못 판단하기도 하였다.

이에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록 추론의 중요성을 받아들이기는 하였으나, 경험주의(empiricism)라고 부르는 철학적 접근이 지식의 원천으로 강조한 감각 경험을 플라톤보다 중요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플라톤처럼 아리스토텔레스도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강한 정서적인 경험을 하는 동안 뇌보다 심장이 더 민감하게 작용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심리학에 기여한 것은 심리학적 주제에 대해 최초로 형식을 갖추어 깊이 생각하였다는 점이다.

중세 기독교 시대 초기에는 심리학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보다는 신학자들이 제공하였다. 가장 유력한 서구의 권위자는 성 어거스틴(St. Augustin, 345~430)이다. 어거스틴은 "내일은 죽을 터이니 오늘 먹고 마시고 즐겨라."라고 주장한 에피쿠로스 학파의 추종자다. 젊어서는 방탕했는데, 그의 이러한 생활은 기독교에 귀의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자서전 <고백(Confession)>에서 자기 분석을 통해 기억과 정서, 동기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기술하였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이서오가 동물적 열정, 특히 성욕 사이의 지속적인 갈등에 대한 통찰을 프로이트보다 훨씬 앞서 제시하였다. 그는 비록 이성을 심리적인 과정을 연구하는 데 사용하기는 하였으나, 그 연구에서 과학적인 방법은 사용하지 않았다.

종교적인 신념에 의해 십자군 원정이 이루어진 중세시대에는 경험적인 연구를 수행하면 처벌을 무릅써야 했기 때문에, 과학적인 연구는 거의 이슬람 지식인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 이러한 흐름에 용기 있게 맞선 사람이 배이컨(Bacon, 1561~1626)이다. 베이컨은 오감을 통해 지식을 획득하는 것을 강조한 아랍 과학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철학자들에게 권위에 대항한 경험주의를 강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신학자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르네상스 정신은 14세기에서 16세기까지 지속되었다. 당시 서구의 권위 있는 학자들은 신학보다는 철학에 의존하여 심리학적인 물음에 대한 답변을 내놓았다. 르네상스 정신은 프랑스의 위대한 수학자이며 철학자, 과학자인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최초의 현대적 합리주의자인 데카르트는 분명하게 증명되지 않은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유명한 명제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와 같이 그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극도의 추론을 사용하였다. 데카르트는 종교적인 지도자들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반대하는 현대의 지적인 견해에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교회 지도자들은 그의 이러한 견해를 자신들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그의 책을 금서 목록에 포함시켰다.

한편, 일부 지식인들은 합리주의보다는 경험주의를 선호하였고, 심리학적인 질문에 대한 신학자들의 생각과 의견을 달리하였다. 이러한 지식인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베이컨이다. 베이컨은 뛰어난 인물이지만 성격적으로 많은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점은 시인인 포프(Pope, 1688~1744)가 그를 "가장 영리하고 현명하며 가장 비열한 인간"이라고 부른 데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지식인으로서 베이컨은 다른 관찰자들에 의한 증명, 회의주의(skpticism), 체계적 관찰(systematic observation) 등을 장려하는 현대 과학적 태도를 이끌어 냈다. 그는 "유용성이 없는 것은 가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영국의 철학자 로크(Locke, 1632~1704)는 베이컨의 경험주의적 사상을 추종하였다. 로크는 인간이 백지상태에서 태어나 감각을 통해 얻은 인생 경험을 통해 지식을 채워 나간다고 생각하였다. 데카르트와 같은 합리주의자들은 지식이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믿은 반면, 로크와 같은 경험주의자들은 "지식이란 단지 인생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유전과 인생 경험의 상대적인 중요성에 대한 관심은 본성(nature) 대 양육(nurture)의 논쟁으로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절충은 독일의 철학자 칸트(Kant, 1724~1804)에 의해 이루어졌다. 칸트는 "지식이란 물리적 환겨의 감각적 조직화와 이해의 생득적 정신 기제에 의한 결과물"이라고 보았다. 예를 들어, 인간은 태어난 곳의 언어 경험에 의해 특정한 말을 하게 되는데, 말하는 능력과 언어는 타고난 두뇌 기제에 의존하므로 경험하지 못한 다른 언어를 구사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은 생득적 언어 기제를 통해 다른 환경에서 다른 언어의 학습과 이해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심리학적인 주제를 연구하면서도 칸트는 심리학이 과학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였다. 그는 정신이 직접 관찰하거나 측정하거나 조작할 수 있는 실체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확신하였다. 더욱이 그 내용은 일정한 흐름이 있으므로 정신의 연구는 과학에서는 필수 불가결한 객관성을 지닐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심리학의 과학적 근원

19세기에 이르러 학자들은 철학자들도 어려워한 심리적 과정의 본질을 연구할 때 과학을 더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19세기 중반까지도 학자들은 일반적인 추론에 근거하여 전기가 선을 통해 움직이는 것만큼 빠른 속도로 신경자극이 신경을 따라 움직인다고 믿었다. 이러한 주장은 19세기 독일의 정신 물리학자 헬름홀츠(Helmholtz, 1821~1894)가 수행한 연구에 의해 증명되었다. 신경자극 연구에서 헬름홀츠는 신경의 황동이 몇 분의 일 초 동안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동물과 인간에 대한 실험을 통해 발견하였다. 한 실험에서는 피험자들로 하여금 발이나 허벅지에 접촉이 느껴지면 버튼을 누르도록 하였는데, 그 결과 피험자들은 허벅지보다는 발에 대한 접촉에 더 느리게 반응하였다. 그는 이러한 차이가 척수를 거쳐 뇌까지 연결되는 발의 신경이 더 길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는 신경자극이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헬름홀츠와 같은 시대의 과학자들은 뇌의 기능에 대해 중요한 발견을 하였다. 그 주도적인 연구자는 프랑스의 생리학자 플루랑스(Flourens, 1794~1867)였다. 그는 특정 뇌 부위 손상이 동물의 행동에 미치는 효과를 연구하였는데, 대뇌의 손상이 운동기능에 부조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또한 외과 의사며 인류학자인 브로카(Broca, 1824~1880)는 인간의 뇌손상에 대해 유사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그는 뇌 앞쪽의 왼쪽 부분에 손상을 입은 환자는 언어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다른 19세기의 과학자들은 뇌의 구조와 별개로 정신 과정의 과학적 연구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과학자는 독일의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페히너(Fechner, 1801~1887)다. 페이너는 당시 과학자들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정신 물리학(psychophysics)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여 연구하였다. 정신 물리학을 통해 페히너는 물리적 자극과 정신적 경험 간의 관계를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성과는 심리학을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없다고 믿었던 학자들에게는 놀랄 만한 것이었다. 정신 물리학은 밝기의 변화를 경험하기 위해 빛의 밝기를 어느 정도 변화시켜야 하는가, 소음의 변화를 경험하기 위해 소리의 크기를 어느 정도 변화시켜야 하는가 등의 연구를 하였다. 이러한 정신 물리학은 철학과 과학 사이에서 태어난 심리학이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발전하도록 기여하였고, 지난 세기 동안 심리학에서 중요하게 사용되어 왔다.

19세기 후반의 심리학자들은 영국의 자연주의자인 다윈(Darwin, 1809~1882)이 주장한 진화론의 영향을 받았다. 다윈은 5년간의 동식물에 대한 연구 결과를 <종의 기원(The Origine of Species)>에 기술하였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동물은 그 선대에서 진화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러한 사실을 실제로 증명해 낸 사람은 바로 다윈이었다. 그의 이론은 그의 사촌인 골턴(Goltaon, 1822~1911)의 연구를 통해 심리학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다.

골턴은 많은 분야에 관심을 가진 과학자였다. 그는 다윈의 진화론을 적용하여 자연선택이 인간의 능력 발달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더욱이 그는 능력이 발달된 개체일수록 생존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사람들 간의 지능, 성격, 신체적 특성의 다양성을 연구하는 개인차 심리학의 발전을 이끌었다.

개인차 심리학(Differential Psychology)은 골턴과 함께 연구한 심리학자 커텔(Cattell, 1860~1944)에 의해 미국에 소개되었다. 1890년에 그는 시각, 청각, 신체적 기술 등 다양한 검사를 기술하는 데 사용된 정신검사(mental test)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다. 또한 1895년에 미국심리학회 회장이 되었고, 심리학자로는 처음으로 국립과학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커텔은 과학과 직업면에서 심리학의 발전에 선구자였던 최초의 심리학 교수로 인정된다.

 

ⓒ현대 심리학의 성장

'심리학은 긴 과거를 지니고 있으나 그 역사는 짧다.'고 한 에빙하우스(Ebbinghaus, 1850~1909)에 따르면, 지식인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심리학적인 주제에 관심을 가졌으나, 심리학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독립적으로 분리된 학문 분야가 되었다.

대부분의 심리학자는 이러한 새로운 학문으로서 심리학의 출발은 독일의 생리학자인 분트(Wundt, 1832~1920)가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실험실을 개설한 시기로 보고 있다. 분트는 1874년 <생리심리학의 원리(Principle of Physiological)>라는 역사적인 저서에서 과학적인 심리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책 제목에서 '생리'라는 용어를 쓴 것은 생리심리학이 주제라기보다는 인간의 생리적인 과정을 연구하기 위해 생리학자들이 사용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적용한다는 의미다.

1875년에 분트는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학생들이 저녁식사를 할 때 사용하던 작은 방에 연구실을 마련하였다. 그는 대학에 심리학 연구실을 요청하였지만, 학생들에게 스스로 마음의 내용을 파고들어 따지도록 하는 심리학의 발전을 원하지 않았던 학교 경영자들은 이를 거부하였다. 1879년 초 분트의 연구실은 커텔과 같이 나중에 유럽과 북미의 유명한 심리학자가 된 그의 많은 학생들에게 연구의 장이 되었다. 심리학자들은 1979년 100주년 행사를 통해 분트의 업적을 기렸다.